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공감 > 공감마당 공감리포트

공감리포트

최신 문화이슈와 문화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문화공감

19세기 러시아 청년들이, 21세기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문화포털 기자단 2015-10-05
19세기 러시아 청년들이,  21세기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19세기 러시아 청년들이, 21세기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

 
 



이반 투르게네프


고전이 눈부신 이유는 시대가 흘러 많은 것이 변할지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살아 숨 쉬는 모습을 그리며 역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서로를 잘 모른다고 하는 게 맞겠습니다.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에서 벌어진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간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21세기의 독자들은 그것을 우리네 삶으로 끌어와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 

 

 
1840년대 지식인 vs. 1860년대 지식인


연극 <아버지와 아들> ⓒ 국립극단


 
186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 ‘아들’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르카디와 바자로프. 그들은 스스로를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에게 현재 세상은 모든 것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건설하기 이전에 앞서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아들들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세대입니다. 그들의 젊은 시절은 1840년대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디의 아버지인 니꼴라이와 백부인 파벨은 귀족 출신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자입니다. 사회적 원칙과 규칙을 중시하며 사랑과 낭만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1860년대는 기존의 차르(카이제르, 군주) 체제와 기독교적 가르침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도전적인 시기였습니다. 그들의 근거는 유물론과 실증주의가 뒷받침하고 있었고, 1860년대의 젊은 지식인들은 스스로 니힐리스트가 되어 가기를 자처했지요.


 
 
 ‘니힐리즘’은 허무주의자?


연극 <아버지와 아들> ⓒ 국립극단
 

 "지금은 부정이 가장 유익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정합니다."

바자로프의 논리입니다. 그들의 무조건적인 부정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부정’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실증주의와 유물론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유익의 유무가 그들의 삶의 가치와 논리의 근거가 됩니다.
 
니힐리스트를 번역할 때 ‘허무주의자’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니힐리스트’는 ‘허무’를 표방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니힐리즘(nihilism)이란 라틴어 ‘nihil’에서 파생된 것으로 ‘완전한 부정의 입장’을 뜻합니다. 19세기 전반기 독일에서는 니힐리스트란 말을 무신앙주의자와 같은 의미로 경멸적으로 사용한 적도 있을 만큼, 니힐리스트는 단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을 가지고 사용되는 어휘는 아닙니다. 투르게네프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 단어를 놓고, 작품에서는 ‘부정하는 정신’을 함유하는 어휘로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바자로프와 ‘나’


‘아버지와 아들’ 원작 표지


 “배가 고플 때 빵 한 조각 입에 넣는 데 무슨 논리가 필요하겠습니까. 
 댁들의 그런 추상론은 우리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바자로프의 외침입니다. 배곯는 일이 흔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 요즈음, 이 외침이 가슴 아프게 들리는 건 왜일까요. 19세기의 러시아라고 해서, 니힐리스트와 낭만주의자들의 대립이라고 해서, 21세기와 별반 다른 모습을 벌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한 기성세대와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하지만 경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실의 세대인 청년세대. 이들 간의 갈등의 골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 어떤 연극에서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했어요!”라고 외쳤던 주인공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사회생활의 첫걸음 대부분을 ‘실패’를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배움의 기간이 끝나고, 이제는 사회에 나가서 내 몫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시기, 그들은 실패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부터 인지하는 아주 비리고 쓴맛부터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니힐리스트’가 먼 나라 얘기는 아님을 직시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우리 시대 청년들은 ‘부정’보다는 ‘포기’와 가까운 듯합니다. ‘삼포세대’를 넘어, 연애와 결혼, 출산, 인간관계, 집, 꿈, 희망을 포기하는 ‘칠포세대’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칠포세대 청년들의 모습에서는 마치, “사랑은 로맨틱한 헛소리고 썩은 미학”이라고 이미 먼저 외친 바 있는 바자로프의 모습이 드리워지곤 합니다.
 
독자들은 작품을 통해 딱히 소중하거나 아름다운 교훈을 얻지는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가 자신의 가치관 전반에 대한 자기 모순적 체험을 겪은 후, 티푸스라는 전염병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도록 마무리를 짓는데요. 어쩌면 니힐리스트에게 가장 적합한 결말이 아니었을까요. 인생이란 교훈과 미학으로 점철되어 있는 아름다운 곳만은 아닌 것처럼, 고전 또한 아름다움과 낭만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좌절감과 실패를 잔뜩 맛보고 있는 청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바자로프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과 공감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적이고 유려한 위로가 우리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질 때도 있지만, 굳이 위로하려 들지 않아도 가슴 깊은 공감과 함께 위로를 받게 되는 작품이 있으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방식으로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참고 자료
- 네이버 백과, 검색어 : 차르
- 네이버 지식백과, 검색어 : 니힐리스트

 

-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장기영(글) / 장수영(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