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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잊지 못할 가을 편지

문화포털 기자단 2015-10-20
책 · 잊지 못할 가을 편지

잊지 못할 가을 편지
 - 편지로 기록된 책들 -

 



마음을 담아 꼭꼭 눌러쓴 편지 한 통 띄우고 싶은 계절, 가을입니다. 스마트폰과 각종 SNS 채널로 즉각적인 실시간 대화가 어디서든 수월한 요즘에는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정성스레 써내려간 편지를 주고받는 기쁨의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받는 것도 좋지만, 타인이 주고받은 편지를 우연히 엿보는 것도 설레는 일입니다. 편지 안에 담긴 타인의 내밀한 교감을 제3의 인물이 되어 바라보는 행위가 주는 짜릿함 때문일 겁니다. 편지 속에서 비슷한 상황이나 감정을 마주하게 되면 타인의 일이 나의 일처럼 여겨지는 감정이입이 일어나기도 하고, 당장 답장을 쓰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 동서고금을 넘어 실존 인물들이 쓴 편지를 묶은 책들을 성격별로 모아보았습니다.

 


 

가족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왼쪽)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겉표지 ⓒ 창비
(오른쪽) 다산 정약용의 초상 ⓒ 위키미디어

 


“편지 한 장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면서 이 편지가 사통오달한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본 뒤에야 비로소 봉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군자가 삼가는 바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다산 정약용이 신유교옥에 연루되어 귀양길에 오르던 40세부터 58세까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며 두 아들과 형님, 제자들에게 띄운 편지를 묶은 글입니다. 2006년에 ‘하피첩’ 세 첩이 발견되면서 다시 주목받은 책이기도 합니다. 하피첩은 다산이 아내가 보낸 붉은 치마 다섯 폭에 아들에게 남기는 글을 써 전한 것으로, 그 낭만성이 더해져 부부의 금슬과 부모의 내리사랑을 상징합니다.

 

다산은 편지에서 두 아들에게는 사랑의 회초리보다 더 매서운 글로 공부를 독려하고, 어머니와 집안 어른들을 모시는 법도를 강조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선비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진지하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슬그머니 웃음 짓게 하는 문장들을 발견하며 ‘아버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산의 유려한 필력과 함께 가족에 대한 사랑이 편지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일 겁니다. 가령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글이 그렇습니다.

 

“네 형이 왔을 때 시험 삼아 술 한 잔을 마시게 했더니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동생인 너의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 형보다 배도 넘는다 하더구나. 어찌 글공부에는 이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거냐? 이거야말로 좋지 못한 소식이구나.”

 

다산의 편지는 2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삶의 뼈를 세우는 지혜의 말들로 가득합니다. 멘토를 찾는 이 시대의 아들, 딸들에게 물려준 귀한 유산입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겉표지(왼쪽) ⓒ 예담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오른쪽) ⓒ 위키미디어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 버렸지. 그런 건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빈센트 반 고흐가 1872년부터 작고하기까지 네 살 아래 동생 테오에게 전한 편지 668통 중 일부를 모은 책입니다. 일생을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서 금전적, 정신적 후원을 받게 됩니다. 반 고흐의 편지는 매번 ‘테오에게’라고 시작합니다. 그 이름이 쓰인 첫 줄을 읽는 순간이면 저 멀리 어둡고 작은 방에서 편지를 쓰는 고흐의 마른 등이 떠오릅니다. 고흐는 테오에게 쓰는 편지 안에 삶의 곤궁함,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성장, 사랑에 대한 생각 등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37년간 지속된 테오에게 쓰는 편지에서 우리는 고흐의 예술적 성취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고, 큰 성취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이들의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정 :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아주 사적인, 긴 만남> 겉표지 ⓒ 문학동네

 


“로잔의 가을은 고국보다 쌀쌀합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니만큼 곡을 쓰기에도 좋고, 시를 읽기에도 더없이 좋은 시간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여행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많은 시들을 쓰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 2007.10.13 조윤석 -


“겨우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 자신이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영혼의 작고 따뜻한 방을 마련하고 싶어서 시를 썼습니다. 볼품없는 시를 하나 마치고 혼자서 목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던 날도 많았습니다.”

- 2009.01.29 마종기 -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은 40년간 미국에 거주하며 시를 쓰는 의사 마종기와 6년 넘게 스위스에 머물며 음악을 하는 공학박사 루시드폴(본명 조윤석)이 세대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2년에 걸쳐 주고받은 우정의 메일을 엮은 책입니다. 사실 이 편지의 시작은 이미 책으로 엮는 것이 기획되었던 것이기에 혹자는 작위적이지 않을까 의구심을 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국에서의 삶이 주는 향수, 예술가이자 생명 앞에 선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고독이라는 공통분모는 36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이들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발판이 됩니다. 한국의 정치, 문학, 음악계에 대한 이야기부터 일상의 생활까지 넓은 주제로 담담하게 펼쳐지는 이야기가 매력적입니다.

 


 

 


<제가 살고 싶은 집은> 겉표지 서해문집

 


“구름배 같은 집이고 싶습니다. 땅의 바람길을 아는 집이면 좋겠습니다. (...중략...)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고 저는 늘 생각하고 삽니다. 꿈은 몸을 긴장시키는 무엇이고, 그러기에 꿈꾸기를 잊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삶은 달라지겠지요. 되는 만큼만 해주십시오. 저는 좋습니다.” 
- 2005.08.25 송승훈 -



“이유도 모르고 놀던 유년의 가을, 그때의 가을은 참 맑았습니다. 마치 오늘처럼 말입니다. 가을 하늘이 너무 맑고 투명하면 기분이 좋다가도 참 서럽습니다. 살고 행하는 모든 것이 맑은 하늘 아래서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2005.10.24 이일훈 -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은 고등학교 국어교사 송승훈이 건축가 이일훈을 찾아가 집을 짓고 싶다고 말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어 2년 넘게 주고받은 이메일을 엮은 책입니다. A4 종이로 208쪽, 82통의 편지가 오고 갔습니다. 단순히 건축주와 건축가의 이해관계로 맺어졌다면 이 긴 편지 왕래는 애초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편지에는 꿈과 추억과 일상이 녹아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가치관과 이상과 현실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고, 가는 길의 온도를 맞추며 살고 싶은 집을 조금씩 지어나갑니다. 마치 다정한 연애편지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어진 집은 낡은 책이 있는 거친 돌집이라는 뜻의 ‘잔서완석루’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집을 짓고 싶은 분이라면 이 편지들을 통해서 삶과 인생이 녹아있고 자연이 함께하는 집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얻으실 겁니다.



 

 

사랑 : <시몬 드 보부아르 연애편지>




(왼쪽) <시몬 드 보부아르 연애편지> 겉표지 열림원
(오른쪽) 사르트르와 함께 체 게바라를 만나는 보부아르 위키미디어


 

“당신은 나의 귀중한 남편이고 나의 사랑하는 시골의 젊은이이며 나의 사람, 나의 넬슨이에요. 네, 당신은 내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아무도 당신을 결코 저보다 더 깊이, 더 따뜻하게, 그리고 더 완전하게 사랑하지 않았으며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시몬.”


 

시몬 드 보부아르는 페미니스트이자 실존주의자입니다. 그녀가 쓴 <제2의 성>이라는 책은 페미니즘의 입문 교과서로 여겨질 정도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여성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장 폴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자유롭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인식되며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보부아르가 미국 작가 넬슨 앨그렌과 20여 년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공개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사르트르에게도 쓰지 않은 ‘남편’이라는 호칭을 그에게 쓰고, 항상 ‘당신의 시몬’으로 맺음 하는 그 편지 안의 애교 섞인 표현들은 그저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보부아르는 1947년 미국을 방문하면서 앨그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큰 매력을 느껴 끌리게 되고, 이때부터 대서양을 넘나든 편지와 만남이 1964년까지 이어집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연애편지>는 그녀가 앨그렌에게 보낸 304통의 편지를 묶은 책입니다. 앨그렌의 대리인들이 편지 공개를 거부했기에 그녀의 편지만이 공개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애틋한 그리움과 더불어 당시 시대 상황을 현장감 있게 바라보게 하는 재미, 그리고 문화 예술계의 거물들이 보부아르와의 만남을 통해 편지 속에서 깜짝 등장하는 재미까지 맛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앨그렌의 청혼을 거절하고도 지속된 서신교환, 그리고 그 이별까지의 상황과 심리 변화가 편지 속에 녹아있어 연애에 대한 단상들을 고찰해볼 기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자연 : <야생초 편지>

 



<야생초 편지> 겉표지 도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무릇 정성과 열심은 무언가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만약 내가 온갖 풀이 무성한 수풀 가운데 살고 있는데도 이런 정성과 열심을 낼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삭막한 교도소에서 만나는 상처투성이 야생초들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주는 귀중한 ‘옥중 동지’가 아닐 수 없다.”

 

 

<야생초 편지>는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황대권이 서른 살이던 1985년부터 마흔네 살이 되던 1998년까지 감옥에서 동생 미선에게 보낸 편지 형식을 빌려서 쓰고 그린 야생초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야생초는 벗이자 연인이자 스승이 됩니다. 이름 모를 풀들의 이름을 찾고, 그림을 그리고, 맛보고, 바라보고, 가꾸며 그는 기막히게 억울한 수감 생활에서조차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숙함을 완성해갑니다. 그가 쓴 편지들은 담담하고, 지성이 넘치며, 겸손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치 수도원의 수도사가 경건하게 써내려간 수필 같고 그가 사랑한 야생초를 닮았습니다. 자유가 억압된 상황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날 수 없는 생활의 고통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고되었겠지만, 그가 쓴 편지들 안에는 유머와 지혜가 가득합니다. 이 따뜻한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변화하고 넘치게 풍족한 삶 안에서도 공허를 느끼는 우리네 가슴이 고즈넉하게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편지를 엮은 책들과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작은 엽서
문화포털 기자단 김채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라는 노랫말이 절로 흘러나오는 계절입니다. 그리운 이에게 짧은 엽서 한 장 써보는 것은 어떨까요. 펜을 쥐었는데도 당장 떠오르는 이가 없다면 마음이 그만큼 허전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책으로 엮인 타인의 다정한 편지를 읽으며 비어있는 마음을 훈훈하게 데우는 것도 좋겠습니다. 

 



* 참고 자료
[도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비, 2010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편역, 예담, 2012
-<아주 사적인 긴 만남>, 마종기, 루시드폴(조윤석) 지음, 문학동네, 2014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이일훈, 송승훈 지음, 서해문집, 2012
-<연애편지>,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정순 편역, 열림원 1999
-<야생초 편지>, 황대권 지음, 도솔, 2004

 

 

-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김채윤(글) / 장수영(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