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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문화관’의 새 이름, ‘청계천박물관’

문화포털 기자단 2015-10-21
‘청계천문화관’의 새 이름, ‘청계천박물관’

‘청계천문화관’의 새 이름, ‘청계천박물관’

 
 

청계천문화관청계천박물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청계천 역사의 산실인 청계천문화관이 2015101, 새롭게 시민들을 맞이했습니다.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 완료와 함께 문을 연 청계천문화관10주년을 맞이해 청계천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열었습니다. 개명한 이유는 서울시에서 청계천 전문 박물관이라는 기능이 더 잘 드러나도록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청계천박물관은 2년여간의 전시 준비와 1년 넘게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상설전시실을 전면 개편했습니다. 리모델링된 이후, 4개의 주제를 통해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청계천의 역사를 다각도로 보여주면서 완전히 색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개천시대, 청계천 역사의 시작

 

 

 

 

청계천박물관 입구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청계천박물관은 여러 박물관들과 달리
, 4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면서 박물관을 관람합니다. 박물관 입구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청계천입니다. 청계천은 조선의 도읍이 한양으로 정해진 이후,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도성 한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하천인 청계천은, 도성의 사람들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하수를 처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연물이었습니다.

 

백악, 인왕, 목멱산의 여러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흐르며, 도성 중심을 가로질러 세 개의 수문을 빠져나가 중량포로 들어간다. 우리나라는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나 한양의 개천은 동쪽으로 흐르므로 수세(水勢)가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한다.’
- ‘
여지승람’ 중에서 -

 

 

 

 

한양도에 있는 조선시대 청계천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한편
, 도성민들에게 친근했던 청계천은 걸림돌이기도 했습니다. 물이 잘 스며드는 모래하천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수시로 범람해 도성민들의 생활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개천을 자연 상태로 내버려 두기에는 도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1411, 태종은 개거도감(開渠都監, 1412년 개천도감으로 개칭)’을 설치해 하천 양변에 돌 축대를 쌓고 얕은 곳을 파내며 다리를 건설하도록 했습니다. 두 달간의 공사 끝에 자연하천을 개천으로 바꿨고, 1444년에 세종이 백성들을 위해 개천의 용도를 하수도로 정하면서 이후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았습니다.

 

한양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생활문화가 달랐습니다. 하천 북쪽으로 백악산 아래의 거주지는 북촌으로, 궁궐과 주요 관청들이 많았고 권세 있는 양반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하천 남쪽으로 목멱산(남산) 아래 사는 지역을 남촌이라 불렀는데, 벼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이현시장() & 1880년대 청계천(아래)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그리고 청계천 인근
(광통교~효경교) 일대를 중촌이라 불렀습니다. 이곳은 시전(시장) 상인들이 곳곳에 많아서 온갖 문물들이 넘쳤습니다. 유명한 시전으로 이현시장, 칠패시장, 운종가 등이 있습니다. 이는 추후에 광장시장, 동대문시장, 남대문 시장 등이 됩니다. 더구나 여기서 놀이 행사들도 펼쳐져 어느 곳보다 생동감 넘치는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이곳은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 문화와 달리 중인 문화의 산실이 됐고 조선 말기에는 개화 운동의 중심지로 나타났습니다.

   

 

자취 감춘청계천과 빛과 그늘의 청계로

 

 

 

 

청계천에서 노는 아이들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이
도성의 개천은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맑은 계곡물이라는 뜻의 청계천이라고 지칭했지만 도시 인구의 증가와 산업화가 심해지면서 생활하수 외에 산업폐수까지 흘러와 청계천의 수질은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청계천의 오염이 심각해지면서 청계천변 주민들의 전염병 발병률이 매우 높아졌고, 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은 제방도로에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된 청계천은 도시의 암종(癌腫)’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사태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청계천 인근에 있는 판자촌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일제로부터 독립된 이후에도 청계천의
아픔은 여전했습니다.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까지 겹치다보니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인데요. 이로 인해 산업 활동이 전개되었고 청계천은 점점 더 더러워졌습니다. 결국 서울시민에게 사랑받았던 개천은 서울에서 가장 부끄러운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청계고가도로()와 전태일 어머니(아래)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1958
, 서울시는 문제적 공간이었던 청계천 위로 청계로와 청계고가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이 복개공사는 물길을 덮는 공사였고 천변의 판잣집들을 허무는 공사이기도 했습니다. 청계로 양쪽에는 현대식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고 여러 시장들이 생기면서 소비재 상품을 중심으로 한 수출 주도형 산업화를 선도했습니다. 이 지역은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아픔이기도 했습니다. 12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과 함께 임금도 적었고 작업 환경도 매우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이 처참한 광경을 알리기 위해 1970년 전태일이 청계로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도 했습니다.


 

 

청계천을 살리자!’ 청계천 복원 사업

 

 

 

 

복원하는 청계천의 4가지 주제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1990
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사고, IMF 등의 큰 사고들로 인해 성장과 개발 위주의 개발지상주의에서 자연을 보존하고 전통을 지키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 더 소중하다는 인식이 자랐습니다. 이와 함께 청계로를 보수할 것인지 또는 철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청계천의 복원과 연결된 문제라서 서울시민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 논란은 서울시장 선거로까지 연결됐습니다.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27월 취임하면서부터 청계천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물론 시민의 의견까지 수렴하면서 1년간의 준비 끝에 20037, 복원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청계천 복원 착공 기념 지하철 표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청계천 복원과 함께 가장 대두된 문제는 청계천 주변 상인들의 대우와 교통대란이었습니다
. 청계로 주변에는 6만여 개의 점포, 21만 명의 종사자, 1천여 개의 노점상들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청계천 복원은 상인들의 살림터를 막는 거였기 때문에 복원 공사에 대한 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과제였던 교통문제는 도심지 교통량 자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청계로와 청계고가도로는 하루 17만 대의 차량이 통행해서 복원에 따른 교통대란을 막아야 했습니다. 서울시는 대책으로 우회도로로 교통량을 분산시키도록 했고 불법 주정차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에 버스노선체계를 변경하고 환승제를 도입해 대중 교통수단 위주로 전면 개편했습니다.

 

 

 

 

청계천 복원공사하면서 출토된 유물들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청계천 복원은 이름과 같이 깨끗하고 맑은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을 정비했습니다
. 하천 하류부의 처리 시설을 새로 만들고 보수했고, 토구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탈취설비를 신설했으며 개구에는 자동수문을 설치했습니다. 북악산과 인왕산 계곡의 맑은 물이 청계천으로 유입하도록 물길도 개선했습니다. 또한, 청계천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물이 흐르지 않은 건천이어서, 항상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따로 공급하는 장소도 마련했습니다. 자양취수장의 원수와 지하수 등으로 하루 12만 톤으로 정해 청계천이 마르지 않는 개천으로 탈바꿈하도록 했습니다. 23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2005101, 5.84km의 청계천 복원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청계천 복원, 그리고 10

 

 

 

 

오늘날 청계천 모습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청계천이 복원된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청계천은 남산, 광화문, 고궁 등과 같이 서울을 대표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청계천을 산책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도시 속 쉼터로 방문했습니다. 타 지역 주민들은 물론 외국인들까지 청계천에 빼놓지 않고 가는 관광명소이기도 합니다.

 

많은 성과들을 거둔 청계천이었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들도 또한 남았습니다. 한강물 공급에 따른 유지관리 비용 과다, 우천 시 오수 유입에 의한 수질 오염, 이주한 청계천변 상인들을 위해 조성된 대체 상권의 활성화 등 여러 문제들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복원 사업이 짧은 시간 안에 이뤄졌고, 비용을 절감하려다보니 미흡하게 처리된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전문가와 시민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 ‘재복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하천 구조를 개선하고 문화재를 제대로 복원하며 유지운영 비용을 절감하는 등의 개선과 보완의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20142월 청계천 시민위원회는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을 확정, 발표해 청계천의 장밋빛 미래를 예고했습니다.

 

 

 

 

청계천박물관 앞에 있는 판자촌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청계천은 남산과 함께 서울 및 우리나라를 잘 표현하고 시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곳 중 하나입니다. 조선시대 도성민들의 생활하수였고 근대 소시민들의 살림터였으며, 현시대 시민들의 쉼터로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청계천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본다면 서울과 청계천을 대하는 마음이 더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겪었던 청계천. 이름처럼 서울의 중심부를 흐르는 맑은 물줄기로 우리 곁에 늘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 청계천박물관 안내

- 개관시간

1) 09:00~19:00 (3~10, 평일&주말)

2) 09:00~19:00 (11~2, 평일)

3) 09:00~18:00 (11~2, 주말)

매주 월요일, 11일 휴관

- 주소 : 서울시 성동구 청계천로 530C(마장동 527-4)

- 홈페이지 : cgcm.museum.seoul.kr

- 입장료 : 무료

- 문의전화 : 02-2286-3410

- 대중교통

1) 2호선 용두역 5번 출구 도보10

2) 마을버스 08, 성동종합사회복지관 하차

 

 

-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김진흥() / 정미리(편집)